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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여운이 남아있는 유배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길 소재동

  • 입력 2015.11.27 13:24
  • 수정 2015.11.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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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여운이 남아있는 유배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길 소재동
조선개국의 이데올로기인 '위민사상'을 정립한 소중한 나주의 자산

정도전(鄭道傳, 1337년 ~ 1398년)은 14세기 후반(고려 말~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형부사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이성계를 도와 혁명을 일으킨 정치공동체 조선왕조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왕도를 한양으로 정도계획하고 수립 실천했던 인물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문물을 정비하는 등 개혁 정치가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마지막 과업으로 요동정벌을 추진하다 지나친 독단과 급진적 개혁조치로 다른 개국공신과 왕족들의 반발을 사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라는 정치적 이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이방원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고, 비록 그 꿈은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6백년 조선의 찬란한 유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으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 시절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로 나주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좋은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삼봉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민본주의를 외치게 만들었던 곳 나주 소재동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길 백암마을에 위치를 하고 있으며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는 삼봉 정도전의 이야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소재동이라는 이름은 이곳 산허리에 소재사라는 절이 있어 유래된 것인데, 소재란 재난을 예방하거나 물리치기 위하여 부적을 태우고 경을 읽는 제식을 말한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인 소재동은 한 평 남짓한 방, 반평 남짓한 평상 마루, 방 옆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 주위에 울타리, 그 앞에는 비석들, 주위에는 나무들이 무성히 녹음을 발하고 있다.
삼봉 정도전이 이곳에 유배되어와서 쓴 작품은 소래동기와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답전보, 가난, 금남야인 등의 산문과 기타 시문이 전하고 있다. 
당시 나주의 평야에서 열 섬을 수확하면 아홉 섬은 농장주가 거두어들이는 피폐한 삶을 유배기간 동안 지켜본 삼봉 정도전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 조선을 창업하여 중앙권력을 잡고 민본주의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어떻게 보면 권문세족의 땅을 뺏어 농민에게 돌려주는 전제개혁은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인 부분이 강하지만 그 기저에는 백성들을 그 근본으로 생각하는 민본주의가 배경이 된 것이다.
현실을 이겨낼 힘이 없던 34세의 젊은 유학자가 백성들의 궁핍함을 알게 되고, 민본사상을 외치며 조선 창건에 사상적 이념을 제공했던 곳 소재동은 삼봉이 머무르며 조선개국의 이데올로기인 '위민사상'을 정립한 소중한 나주의 자산으로 남아있다.
저서 삼봉집에 실린 그의 작품 '가난'에 실린 부인의 편지는 삼봉의 실존적 고독을 '답전보'는 초야에 묻혀 사는 한 농부의 서릿발 같은 비판적 예지를 신랄한 문학으로 표현되고 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의 고려 말 타락한 사회상과 무능력한 왕ㆍ관리들을 통렬한 비판을 들으며 실천을 모르는 지식인의 박학(博學)이 얼마나 무서운 허위인가도 깨닫게 해주었다. 삼봉이 쓴 '소재동기' 에 나오는 소재동은 나주 회진현에 속한 거평부곡이었다. 부곡은 고려시대 천민 집단부락을 말한다. 뒤늦은 1988년 나주시는 논문과 나주정씨 족보를 통해 소재동이 운봉리 백룡산 기슭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지난 2010년 이곳에 한 칸 규모의 초가와 안내판을 조성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자산을 전하기 위한 나주시의 의도와는 다르게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적막하기만 하다.

▲ 소재동
▲ 소재동기

삼봉 정신이 담겨진 소재동은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투자를 통한 관광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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