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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호만애암의 자녀들

  • 입력 2015.10.23 10:03
  • 수정 2015.10.2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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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호만애암의 자녀들

불우청소년에게 유학의 꿈을 이뤄 준 벽안(碧眼)의 한국인 독일 교육자 호만녕부(好萬寧富 또는 호만애암(好萬愛菴), 독일명 프리프 호만(Fritz Hohamn) 선생님

1978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귀화한 독일 교육자 호만영부선생은 고향인 하노버에 그가 만들어놓은 사단법인 한국청소년훈련 하노버 후원회를 통해 들어오는 독일시민들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진 호만애암 장학 운영비로 99명의 독일유학을 보냈었고, 500여 명을 배출했다. 라는 칭송 기사를 게재했고 이후 독일정부의 귀국 명령에 불복하고 순수 교육사업을 위해서 한국에 귀화했고 나이가 들자 학교를 한국인에게 넘겨주었다. 대표적인 교육사업은 나주에 세운 한독 특별고등기술학교로 나주시 발전과 나주교육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정은 다보사에, 공적비는 입구에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호만 선생의 한국 사랑과 인생철학이 주변의 낮은 인식으로 묻혀버린 아쉬움이 가득한 채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을 찾은 것이다. 지난 15일 아버지가 세웠던 나주공고(구 한독고등기술학교, 1965년 설립)을 찾아 부친의 공적과 영혼을 그리며 되돌아 갔다.

호만녕부 선생은 1965년 정식 문교부 인가를 받은 한독기술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1968년 김혜자 여사에게 인계하고 국립경기공전, 영남대 공대교수로 역임하였고 죽음을 예기한 듯 1982년 조기 귀국하여 부인을 상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2년 3월 17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묻게 해달라는 호만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나주 다보사에 모셨다.

방문소식을 들은 남기봉 (전 동신대교수), 허영우(나주시의원), 성수근동문회장 등 동문들과 일부 시민들의 따뜻한 환영 후 호만선생님의 공적을 기린 곳을 찾아가 길을 안내했다.

 

소식을 접한 다수의 시민들 또한 공적에 비해 너무 초라한 대접에 아쉬움을 갖고 한독기술고등학교 후신인 나주공업고등학교에서도 선생님에 대한 배려를 기대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나주발전에 헌신한 인물 기념비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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