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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최초의 시설하우스로 꽈리고추· 찹찹이상추 재배 성공한 윤도혁옹

  • 입력 2014.01.09 16:28
  • 수정 2014.01.0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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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로 시작한 500평을 3000평의 평생 일자리로..

 
나주시 남평읍과 산포면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활주로가 있다. 들녘의 추위를 위로해주듯 따사로운 햇빛이 주위를 감싸주고 있지만 중국의 반갑지 않는 손님 미세먼지가 뿌옇게 들판을 덮고 있어 눈살을 찌부리게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미세먼지에 익숙해져 가야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안타까워질 뿐이다.

활주로 주변 전답들에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시설하우스로 덮어져 있었다. 80년대 말까지 가난에 찌들리던 농촌의 모습들을 되새기면서 현대화로 고소득 사업현장이 된 오늘의 모습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든든해지는 마음이 앞선다. 잠시 과거를 생각하며 향수에 잠겨있는 동안 만나기로 약속했던 윤도혁옹(74세)이 연락을 주셨다. 약속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잠시 후 약속의 장소를 찾아 갔더니 기다리고 계신 윤도혁옹께서 매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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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음료수에 추위를 잊혀보고 가자는 옹의 말씀을 어기고 바로 인터뷰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도혁옹은 주변을 가르키면서 여기 비닐하우스가 전부 내가 채소 재배에 사용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비닐하우스 각동마다 갓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올해에도 농사가 잘되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부지런히 설명을 해주었다. 3000평이나 되는 하우스를 다 돌아볼 수 없었다. 몇 동의 시설하우스 견학을 마치고 평소 사랑방처럼 여기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금화슈퍼라는 곳이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따뜻한 주인아줌마의 마음이 담긴 동네사람들이 휴식처였다.

의식의 변화와 귀향
윤도혁옹은 43년동안을 농업에 종사한 분이었다.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윤도혁옹은 당시의 농촌의 어려움을 얘기하기 전 눈시울을 붉히셨다. 당시 가난했던 윤도혁옹의 모습을 짐작할 후 있었다. 25세에 결혼하여 신혼의 꿈도 채 가시지 않은 28세의 나이에 무작정 상경을 하였다. 돈을 벌고자 상경을 하였지만 세상은 그를 쉽게 반겨주지 않았다. 일거리를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시골 생활에서 몸에 베인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채소작업이었다. 보통 상경하면 시작하는 일이 막노동이었지만 윤도혁옹은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다. 우연히 동국대의 김경재박사 강의를 듣고 생활에 변화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농업기술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1967년 당시 쌀1가마(80kg)의 값은 2800원일 때 상추 1상자(4kg)의 값은 3500원이었다. 윤도혁옹은 귀향을 결심하였다. 30의 나이였다.

변화의 주인공
막상 되돌아 왔으나 자본이 없어 500평을 임대하여 대나무에 걸친 비닐하우스를 짓고 나주최초로 꽈리고추 재배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판로개척도 어려웠고 생산된 꽈리고추 모양을 보고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음식을 해서 맛을 본 경험자들의 입을 통해서 꽈리고추 진가가 전파되었다. 그것은 바로 수익으로 이어졌다. 이듬 해 부터는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성공을 하였다. 자신의 성공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모종을 생산하고 이웃에 전파하여 농가 소득향상에 기여를 하였다. 그 후에도 개운한 맛의 찹찹이 상추·얼갈이 배추재배법을 개선으로 성공을 이어갔다. 또한 기술을 인정받아 나주시의 요청으로 강의를 하는 등 바쁜 생활을 했었다. 지금은 3000평 15동의 주인이 되어있다.

하늘의 뜻
그러나 농사는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뜻을 따르고 문제를 찾아 해결해나가야 한다. 성공과 좌절의 번복되는 것이 농사일이다. 보급된 기술로 과잉생산이 되거나 기후의 변화로 농사를 망치는 사태가 번복되었다. 소득과 연결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농가 고소득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시설하우스 재배를 권하였지만 과잉생산 등의 이유로 농가의 80%이상이 생산비도 못내는 결과가 많았다. 연료비 비료대 인건비 종자대금 상승 등 마음하나 편한 것이 없었고 방치하는 당국에게 강한 불만을 토하셨다. 지금은 아니지만 농민에 대한 푸대접도 잊으실 수 없다고 하셨다. 늘어가는 농가 부채의 안타까운 현실을 얘기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어려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고소득 작물재배에 관심여부를 물었다.
고충을 말씀하였다. 시설하우스의 겉모습처럼 여유있게 보일지 모르지만 말 못할 고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고소득 작물은 투자비용에 비해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재배하고 있는 고추 무 엇갈이 등은 자본이나 기술문제에 부담이 적다는 것이었다. 젊은 층과는 다른 견해를 보이셨다. 융자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안정을 추구하는 마인드가 우선이었다.

아픔이 사랑으로
귀향후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나름대로 성공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한때는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져 실의에 잠겼었다. 가슴에 담은 아들의 모습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그러나 쓰라린 아픔을 넘어 서면서 아이들의 인성교육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모두가 내 자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웃 사랑에 선도자가 되었다.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슬하에 2남을 두고 계셨다. 아들자랑과 며느리 사랑에 대한 열변을 토했었다. 40넘은 아들이 옹의 볼에 뽀뽀해준 것을 자랑스럽게 말씁하셨다. 겸연쩍스런 필자의 마음이었지만 괞찬은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삼강오륜의 법도를 가르치며 자식교육을 했었노라는 자신의 자랑 빼놓으시지 않았다. 지금 땅에 떨어진 윤리가치에 대한 아픔도 토로하셨다. 허전한 마음 같이하였다. 그러면서도 골다공증 고통과 치유를 위해 고생하는 아내의 고마움을 빼놓으시지 않았다.

지역의 보물
갑자기 껄껄 웃으시면 ‘나는 지역의 보물이다.’라는 말을 자랑삼아 하셨다. 이웃 친지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신다는 것이다.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3000평의 농사를 거뜬히 짓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사랑과 봉사에 앞장서고 있으며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옹의 경험을 통해 얻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하셨다. 부자들 부럽지 않는 자식교욱 자랑 빼놓으시 않았다.

74세의 윤도혁옹에게 묻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100세 시대의 현실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미래계획을 물었다. 잠시 말씀을 멈추신 뒤 백범 서산대사의 시를 논하신다. 동감이 들어 정리를 해보았다.
< 夜 雪 >踏雪夜中去 (답설야중거)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밤 눈 >눈을 밟으며 밤길을 갈 때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어른 역할을 하시고 싶다.’ 말했다. 농사일에 열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만족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간단명료한 한마디였고 참으로 듣고 싶은 말이었다. 편견을 앞세우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교훈을 줄 수 있는 따뜻한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자신의 일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신장을 이식하는 아들의 효성 지극한 사연을 듣고는 방송국과 학교, 나주시청에 알려 효도상을 받게 했다. 마을 이장 집에 불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십시일반 금전을 모아 도움을 주었었고, 마을 노인회관에 떡과 팥죽을 제공하혀 훈훈한 사람의 향기를 느끼게 하셨다. 봉사와 희생정신의 표본 윤도혁옹이다. 누가 시킨 것도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닌 단지 우리사회가 밝아지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한 것이라 말하며 “사소한 일이라도 칭찬하고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 한다”고 윤도혁옹은 말씀하셨다.

‘돈 많은 부자보다 마음이 부유한 내가 더 행복하다.’는 말씀이 스쳐 지나가는 한마디가 아닌 오랜 세월속의 경험과 노력 그리고 이웃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우리에게 주는 살아있는 교훈이라는 가슴 뿌듯한 마음으로 되돌아와 이 글으로 끝맺음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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