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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나주를 빛낸 3인의 대표 독립투사 김철(金哲),나상집(羅相集), 나월환(羅月煥)

  • 입력 2015.08.20 16:31
  • 수정 2015.08.2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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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인의 나주 독립운동가들 영원히 나주인들의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광복 70주년 특집 나주를 빛낸 3인의 대표 독립투사 김철(金哲),나상집(羅相集), 나월환(羅月煥)
83인의 나주 독립운동가들 영원히 나주인들의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김철(金哲, 일명 鐵, 1890~1969)
3.1만세운동에 앞장 선 독립운동가. 본관 김해, 본명은 복현(福鉉), 호는 하산(何山), 한말의 창의사 창곤(蒼坤)의 다섯째 아들로 나주시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창곤은 단발령에 항의하여 1896년 2월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을 규합 동헌을 습격해 참서관 안종수와 순검 2명을 처단하고 악질관리들을 가두는 한편 의병들을 규합하여 북상을 준비하다가 국왕의 해산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후 처형당한 지도자적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 광주로 이거하여 광주에서 성장 활동하였다. 3.1운동의 조직을 위해 최흥종(崔興琮)장로와 함께 전남과 광주대표로 선임되어 서울에 올라가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광주로 돌아와서는 국기열(鞠琦烈), 강석봉(姜錫峰), 한길상(韓吉祥), 김강(金剛), 최한영(崔漢泳), 남궁혁*南宮赫)등 동지들을 규합하고 평소에 교유하던 삼합양조장팀이란 독립운동단체와 합세하여 사전에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고 광주 작은 장날인 3월 10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주동자로 검거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에도 감시를 피해 나주, 전주, 목포, 영암 등지에서 암암리에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일정에 다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단식투쟁 끝에 풀려났다. 1933년 2월 큰아들 재호(在浩)를 중구에 보내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시키고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의 외동딸과 결혼시켰다. 재호는 1938년 산서성(山西城) 염석산(閻錫山)부대에서 항일전쟁에 크게 공을 세웠다. 하산(何山)은 50세 되던 해에 영암 신기리에서 광복을 맞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고, 전준이 해산된 뒤 인민위원회에서도 부위원장직을 맡았으며, 46년에는 신민당 전라남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군성의 탄압과 내부의 분파 투쟁에 염증을 느껴 이선으로 물러났으며,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고 고문을 맡아 마지막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5.16군사 쿠데타 이후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전남도지, 독립운동사, 나주시지 )

나상집(羅相集, 1870~1910)
한말의 병장. 이름은 성화(成化), 호는 학산, 상집은 자이며 나주 왕곡면신포리 방아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1907년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을 규합, 전수용(全垂鏞)·김동신(金東臣) 등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한말의 풍운에 항상 나라를 걱정하고 토적보국(討賊報國)을 꾀하다가 1908년 삼향(현재 무안군 삼향면에서 기병하였다. 그리고 삼향과 반남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분소를 습격하여 초병을 참살하고 총검과 탄환을 노획했으며, 나주읍에 있는 적의 초소를 습격하여 초병을 교살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는 등 크게 전과를 올린 뒤 왕곡면 신포리 학산 계곡에 무기 제조창을 설치하여 이문선(李文善)으로 하여금 창과 칼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적을 봉의산(鳳儀山)으로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고 우군을 모두 집합시키니 4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추대에 의해 주장(主將)이 되고, 부장(副將) 정인민(鄭仁珉), 호군(犒軍) 정두면(鄭斗勉, 왕곡면 송죽리 태생, 격전 중 전사), 도집사(道執事) 양재룡(梁在龍, 왕곡면 송중리 태생), 종군(從軍) 안낙삼(安樂三), 도서기(都書記) 양준호(梁俊浩, 왕곡면 송죽리 태생), 운량(運糧), 신학경(辛學敬), 이교민(李敎珉)등으로 부대를 편성, 나주읍에 있는 적의 본영을 공격하여 대전과를 거두었다. 당황한 적은 3개 연대의 병력을 출동시켜 야포로 포위하여 왔으므로 중화기 앞에 대항할 길이 없었으며,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으로 압송 도중 쇠고랑으로 2명의 적을 전격 치상케 했다. 뒤에서 오는 적의 발포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옥에 갇혀 순결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전남도지, 나주군지, 나주시지, 나주목지, 매천야록, 독립운동사)

나주의 독립운동가 나월환(羅月煥, 1909~1942)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광복군지대장, 호는 송죽(松竹), 본관은 금성이다. 아버지 종성(種成)과 어머니 파평 윤 씨의 4남 3녀 중 막내로 영산포에서 태어났다. 기절(氣節)과 용맹이 뛰어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192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들어가서 박렬(朴烈)등과 함께 당시 유행한 무정부주의사상에 심취하였다.
1932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한국혁명당에 가입하고 안재환(安載煥), 최경수(崔景洙)등과 함께 철혈단(鐵血團)을 조직, 항일운동을 본격화하다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여 1936년 제8기로 졸업하고 그 해에 남경군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요인과 본격적으로 교유하였다.
1937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1939년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고 그 대장이 되어 김동수(金東洙), 박기성(朴基成), 이하유(李何有), 한유한(韓悠韓) 등의 간부와 200여 대원을 거느리고 섬서성의 서안(西安)을 근거지로 동관(憧關)을 거쳐 낙양(洛陽), 운성(運城), 태원(太原), 북평(北坪) 등지를 연결한 일선공작에 주력, 섬서.하남.화북의 3개성의 광범한 지역에서 후방침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옮기자 역시 후방공작을 담당하면서 서안에서 중국군 육군상장 호종남(胡宗南)이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閻錫山)장군 막하의 제2전구 및 전작의(傳作儀) 상장의 제12전구 등지에서 항일전에 참가, 후방에 침투, 유격전과 선무공작으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동포를 구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41년 3월 동 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 그 지대장에 임명되고, 적 후방의 선무, 첩보 유격전을 계속하는 한편 중국측 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서안에 있는 중국전시간부 훈련단 제4단내에 특설한 한국청년간부 훈련반에 김천성(金天成), 김세용(金世用) 등 50영명을 입교 교육시켜 광복군 간부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42년 3월 동 지대 박동운(朴東雲) 등 변절자에 의해 중국 서안(西安)에서 암살당하였다. 이 사건에 가담하였던 간부들은 중국전시 4단에서 형을 받았는데 박동운(朴東雲)은 사형, 이하유(李何有), 김동수(金東洙)는 무기도형을 받았다.
오척 단구에 지략과 무용이 겸비하여 중국군관학교에서도 특출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장개석(蔣介石)총통의 인정을 받았으며, 당시 임정 광복군장군 중에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김약산(金若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중추인물이었다. 조국광복 후 김구(金九)선생 일행이 귀국할 때 유해를 봉안하여 태고사(太古史)에 빈장(殯葬)한 후 고향 가야산기슭에 안장하였다가 1986년 9월 3일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복룡 백룡산 아래로 이장하고 동년 11월 11일 비를 세웠다. 1963년 9월 3일 건국공로 국민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주에서는 2006년 금성산 자락의 시민공원에 나월환의 동상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서른의 젊은 나이에 동료에게 살해되면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나월환,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한국독립운동사, 전남도지, 무장독립운동비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나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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