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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기자명 신동운

녹색한우를 전국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 발전시킨 최고의 경영자 정찬주 대표이사

  • 입력 2015.01.29 16:00
  • 수정 2015.01.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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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 농민들에게는 희망을 소비자들에게는 믿음을 주는 한우사업단으로 세계 도약을 꿈꾼다.

 
나주 산포면 내기리 큰 길 가에 자리 잡은 녹색한우에 나주가 낳은 또 한 사람의 거인이 대한민국 한우시장의 역사를 새로이 써가고 있다. 언제 봐도 친절하고 자상한 미소와 언행에서 뿜어 나오는 인품은 실로 우아하다 못해 순진한 시골처녀쯤으로 보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세계를 향한 도전의 의지와 대한민국의 한우시장을 석권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꽉 채워져 있다. 그가 바로 정찬주 녹색한우 대표이사(이하 정 대표)이다.

1968년 대 가난한 시골, 가난도 부족했던지,
극심한 가뭄으로 전남지역 농가가 큰 시련을 겪으며 상당수가 강냉이 죽과 밀가루 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당시 정찬주 대표는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4남 3녀) 중 2남인 중학교 3년생으로 정 대표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등학교의 진학마저도 어려움을 격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논농사로 7남매를 보살펴야 하는 부모님은 자식들의 교육 이전에 생계유지를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당시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중학교 졸업을 앞 둔 그는 가고 싶은 고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장학금 혜택으로 유인하는 고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를 다니면서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신문배달과 주간신문·우산 판매 등의 노력을 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하였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시간에 쫓기며 힘들게 공부하는 그를 지켜보던 담임선생님은 그의 명석(明晳)함을 아까워하며 ‘찬주야! 힘들지만 공부에 더욱 열중하면 좋겠다.’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큰 힘이 되었던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1971년 고교졸업을 앞 둔 정 대표는 또 한 번의 아픔을 겪었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의 꿈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현실은 아픔이었고 그에게 직업전선에 나설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 대표는 현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젊고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를 따뜻이 감싸주었던 아름다운 고향인 동강면의 들판을 바라보며 그는 늘 이렇게 다짐을 하곤 했다. ‘男兒立志하여 出鄕官이니 (남아입지 출향관) 學若不成이면 死不還이라 (학약불성 사불환) -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났으니 배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죽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리라’ 라는 중국인 제벽의 시구이다.

정 대표는 아무 것도 쥔 게 없는 그저 빈손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책상 앞에 앉은 그에게 어른거리는 부모의 모습은 좌우를 살필 여유조차도 없었다. 다만 그의 피나는 노력과 명석한 두뇌는 바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줬다.

1972년 농협중앙회에 입사를 하여 줄곧 정통 농협 맨 38년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2010년 전국 최대의 서울 축산물 공판장 상무진급을 눈 앞에 두고 기획부장을 끝으로 농협인생을 마감하는 동안 축협중앙회 회원조합 지원부 부장, 나 주축산물 공판장 장장, 농협중앙회 축산컨설팅 부장, (주)농협 목우촌 전무이사, (주)농협사료 전무이사를 거쳐 2008년 농협중앙회 축산경제 기획부장을 역임하면서 농협 대표브랜드인 ‘안심한우’를 탄생시킨 거인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88에는 입사 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터득한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著書) ‘축협회계(1988년 초판 2000년 13판 마지막 발행)’를 발간하여 축협업무의 바이블(Bible: 성서)로 통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밀리는 업무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뒤로 미뤘던 대학공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고 드디어 경영학 석사(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취득의 꿈도 이뤄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2000년도 농협과 축협의 통합 파동과정에서 통합에 반대했던 정 대표는 나주축협 공판장으로 좌천이 되어 자리도 없이 많은 갈등을 겪었다. 오로지 축협 발전에만 몰두했던 그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그 다짐이 좌천으로 다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 지인의 도움으로 나주 축협공판장의 장(長)으로 당당히 보직을 받아 근무처가 광주·전남의 최초 해삽(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으로 인정을 받아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정 대표는 그의 영광과 역경의 과정을 번복하는 동안에 어려움을 극복하면 뒷바라지를 해 준 부인 손영희(60)에게 늘 사랑과 감사를 아끼지 않는다. 1981년 지인의 중매로 평생의 인연을 맺은 후 적은 살림으로 시작해 1남(현재 영국 유학 중) 2녀의 성장과 정 대표의 석사 학위취득 과정까지 오로지 투철한 절약정신으로 안살림을 꾸렸던 모습을 대한민국의 어머니들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8년의 긴 농협생활을 마친 정 대표에게는 퇴직 후에도 결코 긴 휴식이 허용되지 않았다. 농협 근무 당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어느 지인의 추천으로 2007년 10개 시, 군 7개 축협 녹색한우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2011년에는 마침내 대표이사로 취임을 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한우브랜드로 대 성장을 이뤄냈으며 전국 백화점 입점, 서울시내 학교급식 등으로 브랜드가치를 향상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녹색한우 플라자를 개점하여 가공에서부터 소비자들의 식단까지 참여하여 소비자의 욕구충족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정 대표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성공이란 단어를 결코 사양한다. 오히려 나주지역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역할을 찾고 있다.

정 대표는‘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할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의 교훈을 안내하고 싶어 한다. 최근 일부 젊은이들의 불확실한 도전정신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신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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