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획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후배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메세지

  • 입력 2014.12.13 10:22
  • 수정 2014.12.13 10:24
  • 댓글 1

‘하면 된다.’ ‘노력한 만큼 거두어 갈 수 있다.’ ‘부족한 만큼 더해야 한다.’ 자아극복의 탁월한 정신

       남기봉 명예교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학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개혁을 통한 가난 극복의 목표는 분명했고 국가발전의 기틀은 기술인을 양성하는 교육에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는 매우 뚜렷했다.
독일은 1964년 박 대통령을 초청한다. 경제협력과 차관을 얻기 위한 방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계기로 한국인의 독일 탄광 취업과 간호사들의 파견이 결정되어 1966부터 1976년까지 총1만226명의 인적교류가 이뤄졌다. 당시 독일인들의 기술력과 기술교육에 감동을 크게 받은 박 대통령은 독일식 기술교육을 한국에 도입을 추진했고 독일정부의 지원으로 인천에 첫 번째 인천 한독고등학교가 설립된다. 라인강의 기적을 모델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나주에서 독일인 호만의 소식을 접한 박 대통령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65년 3월에는 나주 향교의 호만애암을 직접 찾아 격려하게 된다. 호만애암 특별고등기술학교에서 나주한독고등학교로 마지막 나주공업고등학교로 개명되는 현 나주공고의 정신적인 태동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박 대통령의 굳은 의지를 통해 나주 호만애암식 교육이 여수, 마산, 광주, 해남, 안동 등 5개 지역에 분교로 확산되었다. 호만 씨의 노력은 1966년 사위 삿세(후일 독일함부르크 대학교 한국어과 교수재직)등 독일인의 협력을 통해 전국에서 모여든 지원자 중 30여 명의 교사지원자를 양성과 총 232명의 독일유학 등을 통해 각 분야 인재 배출은 물론 현재 국내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도 16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파견된 독일인 기술자의 의무, 책무도 아닌 인간 호만 개인의 인생철학관으로 이뤄진 그의 열정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대사관 관계자들과 불화와 귀국명령 거부를 통한 한국 귀화 그리고 영남대학교수 재직으로 이어졌다. 귀화 당시 한국이름은 호만영부(好萬寧富)라 칭하게 된다. 그가 1982년 타계하시기 전까지 대한민국 교육계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지금은 쓸쓸하게 영정만 다보사에 모셔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유학
남기봉 교수의 독일유학의 길은 호만애암(好萬僾菴)을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74년 초에서야 성취된다. 호만애암 수학(修學)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을 당시 가방 한 개와 단 돈 1 백불이 한국을 떠나는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는 ‘항공료마저도 구하기 어려워 온 가족이 동원되었고 다행히 친분이 있는 김덕영 씨 도움으로 조합에서 대출 받아 마련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독일에 도착한 후 시차 적응도 제대로 못한 채 바로 온 종일 서서 근무하는 작업장에서 그의 독일생활은 시작되었다. 가난을 뒤로 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그의 인내와 부단한 노력 그리고 성공을 다짐했던 초심의 마음은 독일을 떠나 올 때까지 단 한 번도 흩트림 없이 유지했다. 그는 ‘날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는 가족과 호만영부에 보답의 감정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며 회고하고 있다.
독일의 학교제도는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독일대학 진학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부족한 1년을 다시 독일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수하여 획득해야만 했다. 누구나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했지만 그의 장점인 독일어 구사능력과 남다른 굳은 의지를 통해서 그는 이루어 냈다.

언제나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과 오직 이 길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굳은 신념,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날을 극복하기 위해서 피가 나도록 독일에서 어려운 학문의 길이 시작되었고 초지일관된 의연한 자세로 마침내 독일생활 적응에 성공했다. “‘하면 된다.’라는 굳은 의지와 ‘노력한 만큼 거두어갈 수 있다.’ 는 신념, ‘부족한 만큼 더해야 한다.’ 라는 자아극복의 투철한 정신을 후학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이 간절한 나의 메시지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88년 3월 베를린 공과대학교 공학박사 학위 취득은 그는 ‘1964년 나주 호만학교에서부터 그 동안 애써 흘린 땀과 인내의 결과물이다.’라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귀국/나주
1990년 1월1일 독일이 통일되던 날 KBS 위성중계 현장 인터뷰 후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40세 중반으로 진입하는 1990년은 20년의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전환점을 찾는 해이기도 했다. 빈손으로 도착해서 이제는 독일 수도 베를린에 직장과 가정을 이루고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춤과 동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사회적 위상도 갖추게 된 것이다 .
하지만 해가 갈수록 호만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버릴 수는 없었다. 1960년대 멀고 먼 독일에서 열악하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 오신 호만 선생님의 희생정신과 헌신적인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서 아직껏 뚜렷해지며 가슴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호만선생님은 선진 기술교육을 받은 한국청소년들이 보다 더 많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사회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라는 그의 바람이 나주에로의 귀향을 결심하게 된 배경이다.

귀국을 고려하고 있을 때 고향인 나주에도 87년 대학이 설립되어 운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이전부터 국내 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안도 있었지만 과거의 추억과 안정된 독일생활이 귀국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호만애암의 추억과 바람 그리고 그리운 고향산천이 그를 귀향으로 이끌었다.
호만선생님의 크나 큰 은혜와 후학양성의 큰 뜻을 품고 1991년 9월 동신대학교 건축과 교수로 부임하여 그 동안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옷가방 하나와 100불을 쥐고 한국을 떠나 독일대학의 박사가 되고 독일건축사도 되어 돌아온 그는 진정 인생의 보람을 느끼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호만애암 선생님의 신념은 호만학교, 나주한독공업고등학교, 금성종합고등학교, 나주공업고등학교로 이어져 해마다 세계에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의 큰 은혜를 되새기면서 비록 정년퇴임을 하셨지만 지금도 후학과 지역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계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