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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입력 2014.10.31 12:59
  • 수정 2014.10.3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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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경영인 일성기업 창업자 나계환(羅桂煥) 옹(翁)

 
일성기업 창업자 나계환(88) 옹(翁)은 나주 안창리에서 평범한 농가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나주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순수 나주인이다. 소년 시절부터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이 겪고 있었던 가난이라는 사슬을 끊어야겠다는 의지를 가슴에 담고 소박하고 꾸준한 노력으로 몸소 그 꿈을 실현한 작은 거인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세무 공무원, 주조업, 콘크리트 벽돌사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맡은 분야에 최선을 다했다. 나옹에게 많은 시련은 있었으나 단 한 번의 실패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앞서 생각하고 경제를 이끌었던 그는 뛰어난 지역경제의 선도자(先導者)이자 선구자(先驅者)였다. 지금도 그의 성공 사례는 나주 기업인의 모델이 되어 동일계 기업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실례로 나주 D모 기업 H대표 이사는 ‘나계환 회장님은 자동화기계의 도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셨고 동일계 업체의 선각자 역할을 하셨다.’ 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근면과 성실을 소신과 생활철학으로 굳게 무장하고,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굳은 신념으로 일성기업 창업과 계열회사까지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역할을 다했다.
나옹은 지금도 아득한 40대(代)에 세무직 공무원과 주조업 경영과정을 매듭짓고 소규모 벽돌 공장으로 새로운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고 시작한 실로 야심작이었다. 갖은 어려움을 헤쳐 가며 소박하고 성실하게 운영한 결과 회사는 나날이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었다. 앞서가는 감각으로 1982년에는 나주시 성북동 119번지에 일성기업 모체 회사를 설립하였고, 1991년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 252에 콘크리트 벽돌업 계열 중 호남의 대표 일성기업으로 성장하고 현재 장남 나용철(53) 대표이사가 운영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927년생인 나옹은 세무직 공무원으로 직업 일선에 나서면서부터 그의 성실함과 신뢰는 그로 하여금 성공의 길로 이끌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청렴한 직장인으로서의 오로지 책임을 다했다. 스스로의 약속과 성실함에 한 치의 흩트림도 없었다.

매사에 올곧은 생활은 곧장 직장 상사로부터 신뢰로 이어졌고 바로 성공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나옹의 생활을 지켜보았던 지인이 그로 하여금 주조장 경영을 제안했다. 평생 반려자이신 김순임(80) 여사와 많은 고민 끝에 주조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나옹의 근면 성실한 자세는 바로 주조장 경영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했다.
평소 아무리 가벼운 것도 소홀히 넘기는 것이 없던 나옹은 주조업에 손을 대면서 철저한 위생관리와 좋은 재료의 선택에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었다. 정직함과 열정으로 생산된 우수한 막걸리는 곧 바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이는 바로 매출 중가로 이어져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하지만 나옹(翁)은 약 7년 후 주조 사업의 사양화를 예측하고 다른 사업을 구상했다. 그의 성실하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은 3차 산업의 선택보다도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사회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2차 산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1960년 대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2차 산업 육성에 국력을 집중한 것은 나옹의 예리한 사고와 일치했었고 또 다른 성공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일 중 쉽게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성공 가도에는 남다른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피나는 노력, 가족의 적극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었다.

힘든 과거를 회상하고 웃음 지으며 당시 어려웠던 장면들을 조심스럽게 들어내신다.
‘밀리는 제품 주문과 열약한 환경 속에서 장남(현 일성기업 대표)이 옥상으로 올라가 평상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었다.’ 라는 자식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제품 조달을 위해 구입한 중고 트럭이 보험도 없었던 상태에서 사고를 내었을 때의 암담한 심정과 극복과정은 지금도 기억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과 지금껏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기억은 부인의 사랑이었다. 부인 김 여사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결혼 후 나옹이 부지런한 만큼 몸도 마음도 쉴 여유가 없었다. 사업 현장에서 주어진 뒷바라지의 임무는 결코 쉽지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뒤따라야 하는 처지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나하나 지난 기억들을 되새기며 부인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만족해하신 것을 보며 ‘이게 바로 아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구나.’ 라는 감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나옹은 사업승계 후에도 쉴 틈이 없다. 나이가 들었어도 쉬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은 머리에서 내보내시질 않는다.
지금은 호남 최대의 염소 목장을 꿈꾸며 문평면에 1,000여 마리의 염소를 사육하며 성공을 꿈꾸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창조정신과 근면함은 먼 훗날까지 후배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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